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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에 가면 꼭 봐야할 문화재 12개에 대해서 소개해 드릴게요. 아는만큼 보인다고 조금이라도 알고가면 여행이 더 재밌어 진답니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입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입니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요즘은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습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해요.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집니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어요.
공주 마곡사 영산전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양쪽 모두 설이 전합니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어요.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보완해 지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유발하면서(1651) 보완해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입니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시되는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양쪽 모두 설이 전합니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어요.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개선시켜 지었다고 합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유발할 때(1651) 보완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옆면 4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습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해 놓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건물 2층에 걸려 있는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형태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을 2층 대들보와 연결하여 만들었고 마루도 널찍해 공간구성이 시원해 보여요.
조선 중기 2층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양쪽 모두 설이 전합니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어요.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보완해 지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습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입니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어요.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서쪽으로 마련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더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어요.
내외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사용하던 대형 불화를 말하며,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그린 것입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좌우 대칭으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모습입니다. 석가모니불은 용화수가지를 양 손에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손이 다른 육체 부분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부처의 신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둥근 머리광배와 배(舟) 모양의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여러 구를 그려 넣었어요.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제화갈라보살을 비롯한 6대 보살은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되었으며 10대 제자상과 보향·명월천자가 상단 좌우 끝에 그리고 아수라 가루라 용왕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글로 보아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석가탄신일 외에도 수륙재와 49재에 쓰였던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형화면에 나타난 중후한 형태·화려한 색채 등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본존불을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다른 무리들을 주위에 작게 배치하여 석가모니가 일반 대중들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삼신불 가운데 석가불을 노사나불과 고르게 보살형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형태의 그림이며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란 석가의 존명과 같이 각 상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어 불화 연구에 더욱더 주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입니다.
마곡사동제은입사향로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향을 피우는데 사용한 도구입니다.
높이 20.2㎝, 입 지름 19.5㎝인 이 향로는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입부분은 넓은 테가 있다고 하며, 테에는 8개의 구름무늬를 새겼어요. 몸통 가운데에는 4곳에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써 넣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덩굴무늬로 채웠습니다. 몸통 맨 아래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잎을 새겼어요. 나팔모양의 받침대에는 윗부분에 구름과 엎어놓은 연꽃잎을 두었고,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어요.
몸통과 받침대는 따로따로 만들어 연결 시킨 것으로, 연결 부위에는 작은 반원 모양의 받침장식이 있습니다. 몸통 전체에는 무늬를 먼저 새기고, 무늬마다 은을 입혀 넣는 은입사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고려시대 향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함유하고 있어, 불교 금속 공예 연구에 중요시되는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마곡사 동종
조선시대 만들어진 전체 높이 107㎝, 몸체 높이 80㎝의 동종입니다.
동종은 2마리의 용에 의해 매달려 있으며, 몸통 어깨의 4곳에 정사각형의 유곽을 배치하였습니다. 유곽 안에는 돌출된 9개의 유두가 있으며, 유곽의 사이에는 위·아래 각각 원형 머리광배을 가진 보살상을 새겼어요. 몸통의 윗부분에 2줄의 직사각형 띠를 만들어 그 안에 원을 그리고, 범자를 도드라지게 새겼어요. 아랫부분에는 연꽃과 보상화를 교차시킨 덩굴무늬 띠를 만들어, 종 표면의 문양에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동종은 마곡사 오층석탑 동쪽 심검당의 툇마루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종 몸체에 쓰인 글을 통해 조선 효종 5년(1654) 충청도 안곡사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제작 연대와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시되는 종입니다.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마곡사는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큰 사찰로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이라 하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효종 1년(1650)년부터 주지스님인 주순의 노력으로 절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년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모두 불에 탔다.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입니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뤄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개선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합니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습니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입니다.
공주 마곡사 포교당 범종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포교당에 있는 조선시대의 범종입니다. 마곡사는 「태화산 마곡사 사적 입안(泰華山 麻谷寺 事蹟 立案)」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고,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어요.
마곡사 포교당 범종은 신라이래의 전형적인 종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보존상태도 매우 좋고 문양의 표현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종신(鐘身)의 꼭대기에는 등을 크게 구부리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종신을 들어 올리는 모양의 용누(龍鈕)가 있는데, 용의 꼬리는 음통(音筒)을 휘감고 있습니다. 종신의 상대(上帶)에는 국화문양을, 종구(鐘口) 끝부분의 하대(下帶)에는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종신의 어깨 4곳에는 사각형의 유곽(乳廓)을 배치하고, 각 유곽의 테두리에는 당초문을 둘렀습니다. 그 안으로는 유좌(乳座)와 유두(乳頭)를 장식하였습니다. 유좌는 5엽의 꽃판으로 연밥모양의 낮은 돌기를 두었어요. 유곽 사이에는 몸을 왼쪽으로 튼 채 둥근 머리광배에 구름대좌를 딛고 서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 또는 범천(梵天)으로 추정되는 보살상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유려한 선을 사용하여 세련미가 돋보여요.
종신의 하단에는 주종기(鑄鐘記)가 있어 “건륭육년신유팔월(乾隆六年辛酉八月)”, 즉 조선 영조 17년(1741)에 종을 조성하였다는 사실과 조성한 장인, 시주자 명단을 알 수 있습니다.
마곡사 포교당 범종은 조성 시기는 다소 늦지만, 양식에서 신라범종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형태가 거의 완전하고 문양의 표현도 매우 세련된 우수한 작품입니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입니다. 17세기 이후 우리나라 불상의 형식으로 정착하는 석가, 아미타, 약사불의 삼세불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 왼쪽에 약사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석가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왼손은 무릎에서 수평으로 뉘어 2지와 3지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구부렸어요. 아미타여래상은 중품하생인, 약사불은 반대의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하였으나 약함은 놓여 있지 않아요.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덮은 변형식의 편단우견을 입었으며, 양쪽의 여래상들은 속에 편삼을 입은 모습입니다.
세 여래상은 착의법과 수인형식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전체적으로 얼굴이 작고 육체의 비례가 짧은 작고 단정한 모습입니다.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한 번씩 반전되어 접혀져 내려오면서 대의의 끝단을 둥글게 처리한 점이나 양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가파른 속도감을 보이면서 양측으로 접혀져 흘러내린 모습, 왼쪽 무릎에 유달리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이 특징적입니다.
머리의 육계는 밋밋하며 중간계주와 정상계주는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어요. 얼굴은 둥글고 작으며 거의 일자에 가깝게 처리된 얇은 입술이나 구부린 손가락의 표현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입니다.
이 불상과 연관된 복장물은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불상이 안치된 대웅보전은 각순(覺淳)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李奏淵)이 1651년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인 1650~1659년 사이에 마곡사 주지를 지낸 운혜(雲惠)는 당시 저명한 조각장인으로 「사적기」에는 그가 편수를 맡았다는 기록도 있어 이 불사에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여요. 따라서 이 삼세불상은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요.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은 17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보이면서도 둥글고 작은 얼굴에 짧은 비례라든지 주름의 폭이 넓으면서 그 끝단을 부드럽게 둥글게 처리한 점, 그리고 왼쪽 무릎 위에 유달리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과는 다른 점입니다. 17세기 삼세불상을 대표하는 목조삼세불상 가운데 하나로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연구가치도 높다.
공주 마곡사 영산회상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대광보전 후불탱화로 걸려있는 불화입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한 모임을 도상으로 옮긴 불화(佛畵)입니다.
화기에 따르면, 마곡사 영산회상도는 정조 12년(1788) 동홍 등 15명의 화승이 같이 조성하였습니다. 대형의 화면에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인 설법회를 짜임새 있게 그렸으며 비교적 탁한 색감과 도식적인 음영표현 등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및 복장유물
마곡사 영산전 칠불좌상은 1681년 수화승 단응을 중심으로 계천, 성환, 탁밀 등 20여명의 조각승이 같이 제작한 작품으로 현재 전하는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천불상의 주존불로 제작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또한 단응이 수화승으로 독립해서 제작한 불상 중 가장 이른 사례이며, 특히 그의 활동 지역으로 이름 난 경상도만이 아니라 충청남도에서도 활동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입니다. 불상의 특징 가운데 방형의 얼굴이 뚜렷한 이목구비라든가 배 부분에서 W형으로 접힌 대의와 편삼자락은 단응만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3년 칠불좌상에서 후령통과 발원문을 비롯해 경전 잔편 및 다리니 등 77건의 복장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그중에는 무량사판으로 추정되는 묘법연화경(1496년)과 흥복사판 묘법연화경(1586년) 등 서지학상 주요한 자료도 함유되어 있습니다.
마곡사 영산전 불상은 칠불로 구성된 예경대상으로 희귀한 사례이자 17세기 후반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단응의 불상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